- 샅바를 잡고, 인생을 던지다

“1984년, 드디어 그날이 왔습니다.
늘 우승후보였지만, 진짜 1등이 된 건 그해가 처음이었죠.”
1983년, 민속씨름이 공식 출범하면서 대한민국 씨름은 새 국면에 접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이준희는 첫 천하장사에 등극합니다.
그 순간은 단순한 우승이 아닌, 모래판 인생의 터닝포인트였습니다.
그를 따라다닌 별명은 ‘모래판의 신사’.
“샅바 싸움을 안 한 건 아니에요. 다만, 겉으로 안 드러나게 했죠. 하하.”
기자들이 붙여준 이 별명은, 그의 품격 있는 경기 운영과 깔끔한 매너 덕분입니다.

단국대학교 76학번. 그 시절 체육과는 운동선수의 집합소였습니다.
씨름, 축구, 농구 선수들이 한 반에 모여 훈련과 수업을 함께 했죠.
“유인현 교수님, 강용호 학장님... 다 기억에 남아요. 지금도 76학번 동기들과 연락합니다. 오래된 인연이죠.”

지금의 그는 단순한 ‘씨름인’이 아닙니다.
경기력 중심의 개혁, 체급 운영의 고민, 팬과의 거리 좁히기까지...
씨름의 현재와 미래를 진두지휘하는 ‘실행형 협회장’입니다.
“씨름이 재밌어야 산다”는 그의 말엔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선수가 재밌자는 게 아니라, 관중이 재밌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움직임도 많아야 하고, 설명도 필요하고... 결국 팬이 빠져야 씨름이 살아남죠.”
그는 지금도 후배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씨름도 직업입니다. 헬스도 하고, 개인 훈련도 열심히 하세요. 취업 준비하듯, 더 치열하게 임해야 합니다.”
- 단국으로 뭉친 한 컷 '윤응구 사무처장, 대한씨름협회 최지환 본부장, 이준희 회장, 손현호 팀장(왼쪽부터)'
마지막으로 단국대학교 동문들에게는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늘 죄송한 마음입니다. 학교에도, 동창회에도 많이 못 했어요.
앞으로는 더 자주 뵙고, 함께하겠습니다.”
- 이준희, 그는 여전히 모래판 위에 서 있다. 이번엔 씨름을 살리기 위해, 품격과 뚝심으로.
- 샅바를 잡고, 인생을 던지다
“1984년, 드디어 그날이 왔습니다.
늘 우승후보였지만, 진짜 1등이 된 건 그해가 처음이었죠.”
1983년, 민속씨름이 공식 출범하면서 대한민국 씨름은 새 국면에 접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이준희는 첫 천하장사에 등극합니다.
그 순간은 단순한 우승이 아닌, 모래판 인생의 터닝포인트였습니다.
그를 따라다닌 별명은 ‘모래판의 신사’.
“샅바 싸움을 안 한 건 아니에요. 다만, 겉으로 안 드러나게 했죠. 하하.”
기자들이 붙여준 이 별명은, 그의 품격 있는 경기 운영과 깔끔한 매너 덕분입니다.
단국대학교 76학번. 그 시절 체육과는 운동선수의 집합소였습니다.
씨름, 축구, 농구 선수들이 한 반에 모여 훈련과 수업을 함께 했죠.
“유인현 교수님, 강용호 학장님... 다 기억에 남아요. 지금도 76학번 동기들과 연락합니다. 오래된 인연이죠.”
지금의 그는 단순한 ‘씨름인’이 아닙니다.
경기력 중심의 개혁, 체급 운영의 고민, 팬과의 거리 좁히기까지...
씨름의 현재와 미래를 진두지휘하는 ‘실행형 협회장’입니다.
“씨름이 재밌어야 산다”는 그의 말엔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선수가 재밌자는 게 아니라, 관중이 재밌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움직임도 많아야 하고, 설명도 필요하고... 결국 팬이 빠져야 씨름이 살아남죠.”
그는 지금도 후배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씨름도 직업입니다. 헬스도 하고, 개인 훈련도 열심히 하세요. 취업 준비하듯, 더 치열하게 임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단국대학교 동문들에게는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늘 죄송한 마음입니다. 학교에도, 동창회에도 많이 못 했어요.
앞으로는 더 자주 뵙고, 함께하겠습니다.”
- 이준희, 그는 여전히 모래판 위에 서 있다. 이번엔 씨름을 살리기 위해, 품격과 뚝심으로.